야근이 있던 날이었다.
야근을 하게 되면 평소보다 한적한 퇴근길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하며 길을 걸을 수 있다.
이 날은 유난히 어깨가 축 처지는 날이었다.
몸이 힘들거나 일이 잘 안되거나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딱히 파이팅도 필요없고 따뜻한 위로도 필요없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그렇다고 딱히 생각할만한 것고 없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평소에 타던 퇴근버스를 마다하고 걸어서 가까운 바를 향했다. 얼마전에 눈여겨 보았던 바인데 분위기가 비밀스럽지만 따뜻해보였다.
사실 이 날 바를 간건 처음이었다. 항상 집에서만 위스키를 즐겼고 바깥에서 위스키를 먹은 건 처음이었다.

알코올 보다는 피트향에 취하고 싶었나보다. 라가불린 12년 2020 스페셜 릴리즈를 선택하였다.
그렇게 위스키 첫마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첫마디는 안부도, 위로도, 감사도, 격려도 아니었다. 침묵이었고 차분한 응시였다. 마치 눈을 마주치며 널 이해한다는 말이었다.
사실 최근 회사에서 번아웃이 왔고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신념들이 커리어에서도, 관계에서도 흔들리면서 여태 내가 잘 못 살아왔나 싶은 날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단 한명의 동족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나 스스로를 안 어색하게 느낄 수 있게. 다르지 않고 멀리 있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게.

두 번째 잔을 시켰다.
내 편을 찾은 기분이었다. 너가 생각하는 그 신념 그거 잘못된거 아니야. 그게 옳아. 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 결국 그 사람들과 살아가는게 인생이고 그 인생을 사는 너는 그들에게 발 하나정도는 디디고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두 번째 마디를 들었고 정신이 꽤나 맑아졌다. 라프로익의 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으니 오늘 나눈 대화는 충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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